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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야기

[스크랩]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낙네

by 운경소원 2010. 3. 9.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낙네

김여화

 

양미간을 찌푸리고 약간은 비틀거린다 싶게 비스듬히 서서 자전거를 타고 가지 않고 끌고 가는 모양이 안쓰럽다. 머리엔 수건을 뒤집어쓰고 아마도 자전거에 실린 허름한 자루가 무언가 거름인가 무거워보여서 안스런마음은 더한다. 내생각에는 아침부터 뭘하러가길래 저렇게 으등그리부치고 자전거를 끌고 가는 걸까? 그 아낙이 사는 곳쯤은 짐작이 간다. 어쩌면 비닐하우스에 일하러 가는 것일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쓰윽 지나면서 느낀 소감이다.

 

문득 그 아낙의 얼굴에서 한사람의 으등그려부친 얼굴을 떠올린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요진네 엄마다. 우리는 그를 딸 이름을 붙여 요진네 엄마 혹은 그의 친정마을 택호로 새울 댁이라고 불렀다. 지지리 가난하게 살던 매계리에서 이띠기, 지금은 익산시석탄동으로 부르는 곳이다. 석탄동으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하우스 농사를 지으며 그 지은 농산물을 이리구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노점상을 하셨다.

 

어린 시절 내가 이띠기에 가면 집에는 항시 큰어머니가 게셨고 그분, 말하자면 새울댁인 올케는 늦은 저녁이나 리어카를 끌고 피곤에 지쳐서 양미간을 찌쁘리며 대문도 없는 시골집 마당으로 들어서곤 했다. 큰어머니는 당신의 딸을 시켜 밥이라도 해놓고 며느리를 기다리면 좋으련만 딸내미에게는 보리쌀만 갈라서 씻어놓게 하였다.

 

보리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던 시절이다. 올케는 오이, 호박 남의 집 논 빌려서 농사짓고 그 농사지은걸 한 푼이라도 더 받겠다고 장터로 나가는 것이다. 오라버니는 딸요진이와 같은 나이인 나를 딸보다 더 예뻐하며 반기곤 하셨다. 오라버니는 아침에 물건을 가지고 나갈 때는 리어카를 끌어다 주고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오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와서 혼자 낮에 하우스에 심은 작물을 돌보곤 하셨다.

손님인 내가 가면 쌀 한줌 밥솥 한쪽에 얹어서 섞어 시어머니인 큰어머니와 시누이 내 밥만 푸고 나머지 당신네 딸들이나 오라버니 상에는 검은 보리만 퍼서 둘러 앉곤 했다. 좁은 방에서 반드시 상을 두 개를 따로 놓고 드셨던 큰집…….

 

하루 종일 채소를 팔면 지친 올케는 돌아올 때면 녹초가 되어서 힘없이 리어카를 끌고 오거나 물건이 이튿날 팔아도 되는 거면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올케의 장사 속은 아주 이골이 나서 채소를 잘 판다고 했다. 사실 올케는 비교적 넉넉한 형편에서 자랐지만 그 시절 여자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편견으로 기역자도 쓸 수 없는 언문해득을 못하였지만 일단 장에서 파는 물건 값은 잘 헤아렸다고 한다. 물론 처음이야 오라버니가 가르치고 셈을 해주었지만 날이 가고 같은 장사를 반복하다보니 절로 익혀졌던 것이다.

 

지금은 오라버니의 딸 요진이도 일찍이 시집을 가고 아이 둘을 낳고는 저세상 사람이 되고 올케마저도 고인이 된지 오래다. 간경화로 고생하던 오라버니의 병수발을 오래 들었고 집만 지키고 계시던 큰어머니도 짧은 기간이지만 올케가 병수발 한건 물론이다.

 

가난해도 불평을 하지 않았던 올케 오죽하면 큰어머니의 시집살이에 견디다 못해 매계리에서 야반도주 하다시피 오라버니가 올케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겠는가? 하지만 오라버니와 올케는 큰어머니를 모셔가고 시누이 넷을 다 시집보내기까지 애를 쓰고 당신의 딸 요진이는 시집보내어 외손자만 남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가슴을 만 갈래로 짜기웠을 것이다. 더구나 딸요진이는 가까운 동네로 시집을 갔다가 가난한 친정집에 방아 찧은 햇보리 쌀을 가져다주느라고 자전거에 실고 오다가 농수로에 빠져서 세상을 떴기 때문에 어쩌면 올케는 자전거를 끌고 올 때마다 딸 생각에 눈물 젖었으리라.

 

불쌍한 올케의 모습을 아침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낙의 얼굴에서 보았다. 멍청하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도 그저 “내버려둬 오매는 만날 저러셔” 하고 한귀로 흘려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을 차리던 올케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어쩌면 큰어머니의 말씀대로 멍청해서 그렇게 구박을 해도 예예, 다받아주지 않았을까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지청구를 칭찬삼아 다 받아내고 웃었지만 장사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지쳐서 양미간을 찌푸리고 들어왔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저 아낙도 자전거에 자루를 실고 가면서 무거워 자전거를 타지는 못하고 끌고가는 위태로운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자루가 땅에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남자들이 할 일을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아낙들, 농촌에서 보는 흔한 모습이다. 나 역시 농사를 지을 때는 남편이 집을 비우면 남편이 했던 외양도 쳐내야했고 풀도 베어 와야 했기 때문이다. 요새야 하우스를 하더라도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작은 일은 거의 아낙들의 몫이다.

 

농촌의 모든 아낙들은 전천후다. 농사일도 남자들과 독같이 하고 거기다 밥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오히려 남자들보다 하는 일이 더 많아진 것이다. 옛날에 아낙들은 여름날 밭에 김매는 일이 없지만 지금은 설만 쇠면 하우스에서 남자들과 같은 일을 한다. 아마 저 아낙도 아침부터 하우스에 가는 것이리라. 그 나이. 어쩜 환갑은 훨씬 넘고 칠십도 넘겼을 나이인데. 봄비 내리는 아침, 지금은 세상에 없는 요진이, 올케 오라버니 큰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해 낸다.

 

자전거를 끌고가는 아낙의 얼굴에 오래전에 고인이되신 올케의 얼굴이 보였고, 큰어머니 오라버니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출처 : 임실문인협회
글쓴이 : 소원/김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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