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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야기

임실사투리 어휘록

by 운경소원 2019. 4. 15.



오랜 바람, 이제 이루다.

 

김여화

 

오래전부터 나는 안팎에서 사투리를 자주 쓰는 사람으로 내놨다. 일상에서 쓰던 말을 밖에서도 그대로 구사하기 때문이다. 점점 표준화 되어 임실사람도 임실 말을 쓰지 않는 요즘에 누군가는 임실의 사투리를 지키고 써주어야 남아있지 않을까? 내가 쓰지 않으면 기억에서도 사라진다는 위기감에 늘 나는 촌스러움을 지녀왔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구사하는 사투리에 진짜로 시골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더러는 촌티 난다는 말도 들었다. 서울살이를 접고 임실로 시집온 지 올해로 44년째, 특히 임실의 사투리를 모아서 마을유래 책 뒤에 끼운 것이 2007년이다.

지난해와 재작년 사진과 함께 보는 임실의 마을들이 책을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 애써오면서 겸해서 사투리도 목록으로 만들고자 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은 물론 이미 사라져 버린 임실의 말들이 이제는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한 살 더 나이배기가 되어 가니 자꾸만 남겨두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순간 나도 눈 감을지 모른다는 중압감이 사투리를 펴내기로 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묶어야 갰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임실의 사투리는 임실읍 신안리 정잔 출신인 시어머님이 살아생전 쓰셨던 언어들이다. 늘 하시던 말들을 단어로 모았다. 촌에서 태어나 더 산골로 시집와서 80평생 사셨던 시어머님의 말씀은 순수한 임실 말이다.

어머님 생전에 농사일을 하면서 시집살이 하는 동안 들었던 말씀들은 그야말로 오늘 정리를 하다 보니 소중한 보석이다. “하이고 지랄평소 시어머니가 혼자서 한탄 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본인한테 욕하는 말로 알아듣고 낯을 붉힌 사람도 있다.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팔면서 임실의 마을유래와 사투리를 모으기 시작했던 날이 이십년이 지났다. 그제야 내가 들었던 시어머니의 말씀을 돌이켜보며 기록해야 갰다는 일념으로 노인들을 만나면 귀 기울여 기록해왔다.

임실의 방언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마음에는 스마트폰 시대에 나날이 발전해가는 국적 없는 말 대신 고스란히 우리 것, 임실 것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내가 가고 없는 훗날에는 이런걸. 기록해둔 사람도 있었구나. 기억 하도록 남겨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실 내 자식들은 임실에서 났지만 객지에 가서 살게 되니 얼마나 고향이 소중한 건지 모를 것이다. 그래도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은 잘했다고 박수를 쳐 줄 거 같다. 내가 아니면 누굴 시키겠는가?

그냥 내 힘으로 그런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나 역시 이제는 앞날을 염두에 두고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평소 내가 쓰던 말들을 그대로 사용하며 어휘록을 만들었다. 현재 어휘를 구체적으로 분야별로 나누면 편리하게 읽힐 수 있겠지만 그 작업이 내겐 힘이 부치다.

누군가 그러한 작업을 해 준다면 더 좋겠지만 일단 모아서 가나다순으로 정리해야 갰다는 뜻이 책을 만드는 이유다. 내가 기억하는 단어들이 소중한 보물이 될 것임을 믿는다. 다행인 것은 임실 지역은 좁고 시어머님이 본바닥 임실분이라는 것이 내게는 소중한 힘이 되었다. 물론 오수 둔데기나 지시랭이분들이 쓰는 말은 임실읍 사람들이 쓰는 말과는 다르기도 하지만 80평생을 정촌과 상월리에서 살다 가신 시어머니 오순매님의 말씀이 표본이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더 방대한 자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분들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내노력은 참으로 미미하다. 임실사투리를 소중히 여겨 펴내게 기회를 주신 임실문협 이용만회장님께 감사드린다.

 

마흔네번째 봄을 맞으며 상월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