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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야기

노인의 아침 수필 낭독 입니다.

by 운경소원 2019. 2. 26.


노인의 아침.mp3





 

노인의 아침

 

돤서리가 내린 아침, 간밤에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텃논이 하얗다. 자동차 유리창이 하얗게 성에가 끼어 전체가 하얀색 차가 되었다. 이미 화초들은 방으로 들여놓았고, 분에 심어진 나무들은 땅에 묻었지만 아직 베지 않은 논에 서리 맞은 나락을 보니 누군가 저 논이 누구 거? 냐고 물을까 겁나는 아침이다. 예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남보다 일찍 모를 심어야 했고 벼 베기도 일등이어야만 성이 풀리던 나였는데 무심히 지나쳐 내려온다.

오늘처럼 된서리가 여러 번이다. 그러기 전에 저 지난주 감은 따서 곶감을 깍아 천만다행이지 싶다. 감도 너무 무르면 따기가 어렵고, 곶감 깍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산천은 단풍이 들기도전에 퍼런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다. 마을마다 지나는 정자나무 아래는 아직은 시퍼런 이파리가 수북수북 떨어지는 걸보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나무들의 동면 준비가 왠지 낯설다. 서리때문이라는건 알지만 아직도 밭에 그대로인 두태들을 바라보면서 내려오는 길목이다. 우리 동네와 소재지는 적어도 일주일가량 차이가 난다. 그건 봄꽃을 보면 확실해 진다. 열명이 심은걸 혼자서 거둔다는 가을이다. 이때쯤이면 집안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노인들이다. 예전에 우리 시어머님도 그랬으니까, 햇살 퍼지기전 서리가 녹기 전에 들로 나가시던 어머님이셨다. 바쁘게 내려오는 길목에서 노인을 만났다. 엊그제 편지쓰기 대회에서 기역자로 굽어버린 친정어머니의 허리를 보면서 시력장애로 희미한 달빛아래서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아야하는 딸의 애끓는 그리움을 펼치는 장원작품을 읽었더니 아침에 만난 노인이 작품에서서 말한 노인과 영락없다.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이끌고 지팡이를 짚고 비닐푸대 하나를 들고 들로 나가는 노인을 보면서 나는 작품속 그 아낙의 친정어머니를 떠올렸고, 작고하신 시어머님을 떠올렸다. 나의 시어머님도 저 노인처럼 부지런히 돌아가시던 가을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등굽은 그 모습으로 한손에는 지팡이를, 한손에는 비닐푸대 아니면 무엇인가 묶을 끈을 들고 들로 나가셨었다. 예전에는 끈이 칡넝쿨이나 짚으로 꼰 새끼에서, 나중에는 담배를 엮었던 비닐 끈이다. 그걸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혹 무언가 밭에 가면 소용 닿은 것이 있다는 말씀이셨다.

세 노인을 비교해본다. 작품속의 어머니는 말린 고구마처럼 쪼글거릴거라며 그 얼굴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만져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나는 오늘 문득 마주친 노인에게서 나의 시어머님 모습을 본다. 비슷하다. 멀리서 본다면 똑 같다. 굽은 허리, 지팡이, 비닐푸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더라? 구월 스무닷새 오늘이 시어머님 의 생신이었던가? 아마 그랬을 거야. 하는 말을 혼자서 뇌까리며 달린다. 당신의 태어난 날을 잊을 만큼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어머니셨다. 마음속으로 짚어본다. 어제는 친정아버님 생신이었고 그러다가 문득 시어머님 생신이 한 달 뒤라는 생각에 머무른다. 그랬다. 시월상달 스무닷새, 난 문득 마주친 노인을 보면서 시어머니의 생전의 모습인양 착각을 했고, 또 생일까지도 한달을 당겨서 기억해 낸 것이다.

작품속의 아낙은 두 달쯤 지나면 쉰하나라 했다. 나는 며칠 후면 예순 셋이다. 환갑진갑 다 지난 아낙이 되는 것이다. 나의 시어머님은 80 이셨다. 작고하시던 그해 가을 내내 아침에 만난 노인처럼 가을걷이를 하셨고,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나면서 들앉으셨다. 그분은 참으로 복 받은 노인이셨다. 가을걷이까지 마무리하고 그 해 섣달 설을 막 쇠면서 돌아가셨는데 며느리들 힘들이지 말라고 하셨는지 시 할머님과 같은 날이 기일이다.

죽음 복을 잘 타고 나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시어머니, 나는 이미 오래전에 한번, 작년에 두 번째 중풍을 맞았다. 가볍게 맞은 것은 하늘이 도우심이다. 시력장애로 친정어머니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는 아낙의 글이 어젯밤 내내 가슴을 울컥 이게 했는데 아침에 만난 노인을 보니 시어머님이 그립다. 당신의 염려만큼이나 죽음 복을 잘 타고나신 시어머님이 그립다. 된서리가 하얗게 논바닥을 덮은 아침, 하얗게 서리 내린 노인의 머리와 등굽어 걸음걸이도 비척거리는 노인의 아침이 왠지 시퍼런 채 떨어지는 은행잎만큼이나 수런거린다. 노랗게 물도 들기 전에 떨어지는 두충나무 잎도 두런거리는 것 같다. 떨어지긴 너무 이르다고 아우성을 치는 듯싶다, 이제 예순셋에 이른 나는 저 두런거리며 떨어지는 은행나무 두충나무 잎이 된 것만 같다. 아직은 이르지 싶은 마음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무거운 머리와 어께를 짓누른다.

사람이 맞는 된서리, 그게 바로 중풍이라는 바람이 아닐까 싶어져서 이른 아침 들로 나가시는 노인의 아침이 무척이나 부럽다. 문득 그 노인에게서 복을 잘 타고나신 시어머님을 그리고 눈이 안보여서 친정어머니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는 그 아낙의 편지가 가슴을 후빈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만큼이나 시린 아침이다.

사투리

 

가을걷이 - 가을곳식을 더우어 들이는 일

나락 -

두태 - 콩과 팥

된서리 -늦가을에 내리는 많은 양의 서리

들앉았다- 활동을 잠시 혹은 완전히 나갈수 없는 상태

비척거리다- 한쪽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것

시월상달-햇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라는 뜻으로

- 성질, 성품

텃논 - 집앞에 있는 논

햇살퍼지기 전 - 햇빛이나오기 전

 


노인의 아침.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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