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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야기

[스크랩] [성북/돈암] 도심 속 넉넉한 여유의 공간, 삼각산 흥천사(三角山 興天寺)

by 운경소원 2012. 3. 30.

정릉의 원당, 조계종 본산이었던 절집,

삼각산 흥천사(三角山 興天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595  /  02-921-1626

 

조선최초 왕후의 원찰,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아 번창한 절집입니다.

번잡한 도심 속,

작은 고요함이 가득한 절집,

마지막 왕후가 머물기도 한 유서깊은 저립,

삼각산 흥천사에 다녀왔습니다.

 

 

 

1396년(태조5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도성 밖에 능을 두게 되어 있으나 강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던 태조는 정동에 능을 마련하게 됩니다. 지금의 정릉입니다. '정동'이라는 지명도 사실은 정릉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강씨를 위한 원찰을 세우니 1397년(태조6년)에 170여칸 규모의 '흥천사'를 세우며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습니다. 가람이 마련 된후에는 '절집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에 수저를 들었다.' 할 정도로 사별한 부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엿볼수 있습니다. 이 후에도 태조는 당시 조선 유일의 석가모니 사리불을 통도사에서 가져와 사리전을 짓는등 흥천사의 사세는 날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는 반대로 2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은 계비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원비 한씨가 아닌 계비 강씨의 아들들을 세자로 책봉하는데서 오는 불만이었지요. 이는 곧 왕자의 난으로 이어져, 강씨의 아들 방번, 방석과 개국공신 정도전을 제거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상황도 엮이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던 1408년(태종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정릉을 도성밖으로 옮겨버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릉의 석축들은 태평관(명나라 사신의 숙소) 보수에 쓰였고, 일부는 청계천의 광교보수에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속에도 흥천사는 태조의 평소 부탁대로 그대로 두었으나 절집에서 일하던 노비들의 수를 줄였고,  태조가 하사한 밭의 면적을 줄이게 됩니다. 이 후 세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명으로 흥천사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으며, 특히 불교를 신봉하던 세조는 동종을 만들어 시주하는등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금 창건 당시의 모습을 찾아가는 듯 하였지요. 

그러나,세종과 세조의 지원을 받던 흥천사는 권력이 바뀌는 시대를 쫒아 왕실의 지원이 감소 되면서 불안한 기운이 돌기 시작합니다. 연산군은 궁에 있던 내원당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절의 불상을 양주 회암사로 옮기게 하고, 절집은 사복시(司僕恃)로 삼게 됩니다. 1504년 (연산군10년)에 들어서는 흥천사에 화재가 일어나 사리전을 제외하고 불에 타버린 후 방치 되다가, 1510년(중종4년) 불교배척을 외치던 유생들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어 절집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왕실의 원찰로 일어나 성하였으나, 왕실의 묵인하에 흥천사는 그렇게 사라져간 것입니다.  

 

그러던 1669년(현종10년), 송시열의 건의로 정릉을 중수하면서 인근의 암자 신흥암을 신흥사로 이름을 바꾸며, 정릉의 원찰 역할을 하게 됩니다. 1794년(정조18년)에 들어 성민스님과 경신스님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옯겼고, 1865년(고종2년)에는 대원군의 지원으로 크게 중창하게 됩니다. 이 때 세워진 가람들의 지금의 모습으로 극락보전과 명부전, 만세루가 세워지게 된것이지요. 대원군은 신흥사와 정릉이 가까운 이유로 정릉의 원찰이었던 이름을 다시 쓰게 하면서 흥천사 편액을 내렸으며 이는 만세루에 걸려 있습니다. 이로서 300년동안 사라졌던 흥천사의 역사는 다시 시작 되었습니다.

흥천사의 가람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유지 되었고, 한국전쟁에도 온전하였습니다. 한국전쟁 격전지 미아리고개와 가깝습니다.

포화속에서도 온전히 남았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순종의 계후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황후 윤씨가 머물며 하루 1홉의 양식으로 지내며 그 중 1줌씩을 모아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로서 흥천사는 조선 최초 왕후의 원찰이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왕후가 머물던 절집입니다.

주위로는 복잡한 골목길과 고층 아파트들이 함게 하고 있어 '과연 이곳에 절집이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이지만, 막상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함이 더 가득합니다.   

 

흥천사 부도전

 

 

일주문을 지나 너른 마당에 닿고 나면 흥천사의 경내입니다.

가는길이 조금은 복잡스러움도 있어 지나는 분께 여쭈니 흥천사 보다는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알려 주시는 군요. 아직까지 신흥사라는 이름과 함께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단촐한 흥천사 부도전을 지나면 맞은편으로 높은 계단이 길게 누워 있지요. 절집의 마당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몸이 불편하신분들은 절집의 담을 끼고 조금 더 걸으면 평지에서 절집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계단에 올라서면 'H'자 형태의 가람이 당당하게 서니 만세루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 왕실의 원찰에서 흔히 나타나는 형식으로 왕족이나 사대부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진 양식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파주 보광사(숙빈 최씨의 원찰), 수락산 흥국사(덕흥대원군 원찰)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를 만날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많은 불상들과 불화들이 걸려 장식을 하고 있으며, 많은 방들을 꾸몄는데 이로 '대방(大房)이라고도 불립니다. 중앙에는 시원스럽게 쓰여진 흥천사(興天寺)편액이 걸려 있는데요. 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라 전합니다.

대방을 두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명부전을 만납니다. 붉은 편액의 '명부전 글씨는 고종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명부전의 뒤로 나즈막한 언덕에는 하얀 분칠을 한 관음보살상이 자리합니다. 보살상을 병풍처럼 감싸안은 바위에는 여러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 중 한곳에는 산신상이 자리합니다.

그 아래로 내려서면 흥천사의 본당인 극락보전으로 절집에서는 가장 오래된 가람입니다.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좌우로 산중탱화와 아미타구품도가 걸려 있습니다. 본당의 옆으로는 익숙지 않은 가람이 자리하는데 용화전이라 부릅니다. 용화전을 뒤로하고 극락보전의 계단을 향해 내려서면 새로 조성된 흥천사 칠층석탑이 싱싱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대방

 

 

 

 

범종각

 

 

연화대(蓮花臺)

흥천사 건물중 올해 4월이면 철거될 건물입니다.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극락보전(極樂寶殿, 유형문화재 제66호)

흥천사의 본당으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입니다. 흥천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철종4년(1853년)에 중수 되었습니다. 정면의 3칸 모두 꽃창살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고, 창사이의 기둥위로 용머리장식을 했습니다. 조선건축의 양식에 충실한 따랐으며, 우물천정에 우물마루를 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산중탱화와 아미타구품도가 좌우로 걸려 있습니다. 

 

      

  

 

 

용화전(龍華殿)

미래에 올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전각입니다. 광복이후 세워진 것으로 중앙의 한칸만이 원래의 모습이었다가 후에 좌우의 유리창이 달아 공간을 넓혔습니다.

 

 

관음보살상과 산신상

 

명부전(冥府殿, 지방유형문화재 제67호)

1855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의 맞배지붕의 건물입니다. 조선후기양식을 갖춘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명부전의 현판은 다른 것과 달리 붉은색 바탕에 글씨를 쓰고 세로로 달려있습니다. 글씨는 고종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방의 옆면과 흥천사 칠층석탑

 

 

by 박수동

www.gilson.asia

출처 : 길손의 旅行自由
글쓴이 : 길손旅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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