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푸성귀
김여화
아버지가 밭에서 해다 주신 메밀대는 항상 연하고 싱싱해서 벼락치기로 커다란 양푼에 고추장을 넣고 버무리면 참으로 별미였다. 우리는 늘 매밀 대를 벼락 쳐서 밥을 비벼먹었고, 아버지가 해 다주신 들깻잎은 끓는 물에 데쳐서 물기를 꽉짜버리고 프라이팬에 볶아놓으면 생긴 것은 검어 질리게 해도 맛은 최고였다. 특히 들깨는 팬에 볶을 때 식용유를 많이 두르지 않아도 탈 염려도 없이 제 몸에서 나는 기름기로 인해 더욱 맛나게 볶아지곤 했다.
어느 여름이던가? 이제는 그 햇수도 기억나지 않는 그해여름, 아버지는 동구릉 가는 길목의 과수원 한쪽 밭귀퉁이를 얻어서 식구들이 먹을 푸성귀를 갈아 직접 가꾸며 점심때가 되면 메밀이나 들깻잎을 해다 주셨다. 그때의 가족들은 아버지 어머니와 오빠 내외 오빠의 아이들 셋, 우리자매들이 여섯에 우리아이들 둘 그래서 우린 열다섯명이 한지붕아래서 북적대며 살았다.
가내수공업으로 아이들의 옷을 하청 받아 만들어 남대문 아동복판매점에 납품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돈벌이였다. 온가족이 아동복 제품 만드는데 매달려서 오빠는 재단을 해오고 나와 동생들은 재봉틀을 했고 올케랑 어머니는 뒷서드래일을 해주시고 아버지는 거의 공장에서 실밥을 따거나 그 외의 시간에는 조카들을 돌보아주었고, 손자들을 앞세우고 과수원 밭을 얻어 깻잎이랑 메밀이랑 열무를 갈아서 이런 여름이면 굳이 시장으로 야채를 사러가지 않고 아버지의 노력으로 우리는 맛있는 메밀무침을 깻잎볶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나마 아버지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으셨기에 메밀씨도 며칠간의 여유를 두고 뿌렸고 들깻잎도 어느 정도 자라면 다시 씨를 부어서 연신 떨어지지 않게 기르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손자를 업고 있다가 허리를 넘겨서 아니지 손자를 떨어뜨려서 그 손자, 내게는 조카 놈은 끝내 늑막염으로 죽고 말았는데 그 원인이 아버지라는 원망에 괴로워하시며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셨다.
이맘때쯤에는 들깻잎을 송두리째 뜯어서 담뿍 자루를 짊어지고 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길에서 밥상에 올라온 나물들은 우리들은 마파람에 개눈감춘다고 했던가? 아무리 큰 양푼으로 가득해도 여자들이 이 둘러앉아 금새바닥을 보고 말던 여름, 문득 들깻잎을 뜯다가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지친 모습이 보인다.
유난히 곤고하게 사셔야만 했던 아버지의 일생은 당신의 여식을 잃고 젊은 날을 술로 보내다가 늙어서는 손자까지 잃고 그 쓰린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생을 마감하셨다. 참으로 가여운 분이다. 당신의 업보였던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고생을 하다가 서울로 가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하고 사기를 당하고 남겨진 것은 빚뿐이었다.
훗날 아버지는 아예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노인으로 전락해서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오빠가 하청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일도 생겨났다. 온가족이 한집에서 먹어대야 하는 반찬값을 보태기 위해 생각한 것이 열무를 심고 들깨를 모 부어서 그걸 뜯어다 반찬거리로 삼게 하셨고 메밀도 물물이 심는 시기를 달리하시어 식구들의 반찬 비용을 거들어주시기도 하셨다.
해서 나는 메밀을 보면, 들깻잎을 모 부어 놓은 걸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호박넝쿨이 뻗어가고 풋호박이 열려도 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들깻잎이나 메밀잎속에서 나오는 풋호박은 참으로 반찬거리에 여러 가지로 좋은 재료였다. 호박이 많으면 채 설어 물기를 짜고 애호박만두도 만들어 먹고 풋호박을 썰어 전을 부쳐도 일품이 아니었던가? 아버지는 그렇게 두해여름을 푸성귀 심는 재미로 사시었다.
퇴근 후 들깻잎을 뜯어야 겠기에 밭고랑에 엎어져서 바랭이를 뽑으면서 명아주를 뽑으면서 깻잎을 아예 송두리째 뜯고 있으니 그 어느 여름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볶아놓은 들깻잎은 향도 좋았고 한참 먹을 나이인 우리들의 밥반찬으로는 최고의 특식이었다. 그렇게 날마다 찬거리를 준비해다 주시는 아버지께 누구한사람 고마워하지 않았었다. 오늘 문득 그때의 아버지를 돌아보니 가족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메밀은 항상 밭에서 막 베어온 싱싱한 푸성귀였고 들깻잎도 이제 생각해보면 우리가족들을 위한 영양식이었다. 식구가 많아 자주 고기를 사다 먹을 수도 없던 시절이라 들깻잎은 우리가족들에게 영양공급원이었다는 말이다. 이웃들에게도 나누어 주며 아버지는 여름이면 호박도 가꾸고 오이도 가꾸면서 그중에 쉬운 것이 메밀 갈기와 들깻잎 모종붓는거라고 하셨던 기억도 있다.
나는 길가 밭 한 뙈기에 나무를 심고 나무 사이마다, 토란이며 야콘, 양파 이것저것 심고 그래도 땅이 남아 두둑을 만들어 들깨 씨를 뿌렸다. 가물어서 드문드문 나더니 두둑의 고랑 사이로만 난 것은 오늘 큰 것들을 뜯으면서 보니 두둑에 많이 올라오는 싹들은 수분이 부족해서 노랗게 변했다. 봄채소는 큰걸 뽑아먹고 가을채소는 잔 것부터 뽑아 먹어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는 우선 큰 것부터 모조리 모가지를 자른다. 자른 것은 나중에 비가 내리면 다시 속잎이 자라기 때문이다.
나날이 수북수북해지는 들깻모종은 하도 씨를 많이 뿌려서 밭두둑이 콩나물시루 같다. 아무렴 어떠랴 먼저 자란 것부터 잘라다 해먹으면 바로 올라오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내손가락의 퍼런물이 들었다. 맞아 아버지의 손가락도 늘 퍼렇게 물이 들곤 했었지. 나도 메밀 씨를 구해서 좀 뿌려야 겠다. 그 옛날처럼 메밀대도 솎아다 먹으면서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메밀대도 삶아서 무쳐먹기도 했지만 올케는 양파를 채 썰어서 날로 무치기를 즐겼다. 여러 명의 시누이들이 밥을 비벼서 맛있게 먹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메밀대는 참으로 좋은 푸성귀였고 들깻잎도 좋은 반찬거리였다. 해마다 아버지의 푸성귀가 날 때 쯤이면 떠오르는 그해여름, 큰양푼에 비비던 밥과 푸성귀를 자루에 담아 짊어지고 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 많은 식구들의 끼니를 맡았던 올케의 모습도 지금은 눈에 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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