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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야기

[스크랩] 임실 등 1945년 광복 전후 전북에선 무슨 일이…의병·학생·농민운동 전개

by 운경소원 2011. 8. 16.

 

 

임실 등 1945년 광복 전후 전북에선 무슨 일이…의병·학생·농민운동 전개


2011-08-14 오후 8:28:48

 

한말·일제시기 대표적 침략·수탈 표적도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국경일로 지정된 광복절.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까지 전북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국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전북 독립운동사적지)에 따르면 1895년 이후 해방까지 여러 계층에서 전북지역을 무대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한반도의 서남부에 자리한 전북은 지형적으로 전주를 중심으로 동부의 산악지대와 서부의 평야지대로 구분돼 있다.

 

그중 만경강·동진강 연안의 호남평야는 국내 유수의 미곡 산지를 이루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전북은 19세기말부터 일제 식민지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수탈의 주된 표적이 되었던 지역이다.


물산이 풍부해 생활이 안정적이었던 전북은 예부터 많은 학자·문인들을 배출했다. 또 조선왕조에는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충군애국 사상에 기초한 유생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 된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 초기에는 많은 의병장들이 앞장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 의병운동= 1895년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전북에서의 의병활동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북에서도 대대적인 활동이 전개됐다.

 

이 시기 전북에서는 태인의병이 일어났다.

 

전투경험이 없는 유생과 농민군으로 구성된 태인의병은 비록 활동기간이 짧았지만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의병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또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조치로 인해 후기의병이 전국 각처에 조직돼 활동을 전개했으며 전북에서도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됐다.

 

특히 1908~1909년 사이 전북지역의 의병운동은 통계상 의병의 규모나 교전횟수에 있어서도 전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활동을 보였다.


▲ 3·1운동= 전북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1919년 3월 1일께 기독교계학교였던 군산 영명학교에 전달됐으며 이후 전주와 임실에도 전달됐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전북 최초의 만세시위가 3월 5일과 6일 군산에서 비롯됐다.

 

이는 호남 최초 만세시위운동이었고 그 영향은 전라도 전역으로 급파됐다.

 

3월 5일 군산 만세시위를 필두로 전주·군산·김제 등 도시지역으로 확산됐고 임실 천도교를 중심으로 순창·정읍·남원 등의 지역으로도 확산됐다.

 

4월 말까지 전북에서 이뤄진 독립만세 시위는 약 80여차례이며 1만3000여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 학생운동= 호남에서 처음 발생한 군산의 만세운동은 영명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됐다.

 

1919년 3월 14일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군산국립보통학교의 학생 70여명이 동맹해 퇴학원을 제출한 뒤 3월 23일 밤 학교에 방화한 대표적인 학생운동이었다.

 

전북 각지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황민화교육이 더욱 강화된 1930년대 이후에는 비밀결사 조직, 맹휴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 농민·노동운동= 전북 서부지역을 흐르는 만경강과 동진강 연안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펼쳐진 우리나라 대표 곡창지대다.

 

국내 유수의 미곡 산지를 이루는 이 지역은 한말과 일제시기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적 침략과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이 지역은 일제시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 곳곳에 산제해 수많은 우리 농민을 소작농으로 고용했다.

 

일본인 농장주의 압박과 수탈은 한인 소작농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족투쟁으로까지 승화됐다고 한다.

 

출처 : ♣ 임실사람들이야기 ♣
글쓴이 : 제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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