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멀방죽 1(큰우물, 큰방죽, 큰마을) 음악 - 해변의 여인/연주곡
중딩때 봄,가을 소풍을 가던 곳이다. 교장선생님이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고 그 먼길을 어김없이 걸어서 가곤 했다. 지금은 장기자랑하던 산속 잔듸 밭은 오수-남원간 직선도로가 뚤려 온데간데 없다. 옛 추억을 되집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그림들이다.
그래도 이 곳이 세계적 희귀종이며 멸종위기에 처한 가시연꽃(사진아래)의 자생지임이 밝혀져 군에서 생태공원화 해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또 다른 감회가 있다.
이 곳에 대한 사설은 임실 관촌 출신의 수필가 "김여화"씨가 쓴 글로(아래) 대신할까 한다. 친구들 시간내서 가족끼리 아님 애인과 한번 둘러보시라 .
대멀방죽2
이곳은 그 옛날 둔덕방에서 제일 큰 마을로 흔히 대말로 부르며 지형이 야자형(也字冊)이라해서 조선초기 대야촌(大也村)이라 부르다가 조선 중엽에이르러 마을이 크다해서 대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형성될때 선정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구전 되어온다. 일제가 지배 하면서 이곳을 일본식으로 대정리라 명명 했다는 해주오씨 후손 형묵옹의(亨默)전언이다.
형묵옹의 기억으로 이곳은 전형적인 집성촌인바 고려때 남양홍씨 구암 현감이 부임해 온뒤 홍씨들이 세를 이루다가 자시라진뒤(스스로 소멸됨) 홍성장씨 함창현감이 나와 오래 살므로서 세조때는 이곳 동네 뒤편은 장택거리, 혹은 장터 거리라 불렀다는 곳이다.
이는 장씨들 터라는 이야기다. 그런 흥왕하던 장씨가 다 사라진 뒤 현재의 해주오씨는 그의 외손이었다 한다. 당시 조촐이 상석을 올렸다고 하며 이곳 대말에서는 대과 3장이 난곳으로 터가 좋은 탓이라 믿고 있다.
이곳에서 11대째 터를 지킨다는 형묵옹의 올해 연세는 81세 이곳에는 마올이 큰 만큼 큰 방죽이 있어 답 위주의 윤택한 가정이 많은데 장수촌으로 더 유명하다.
현재 70 을 갓을 넘긴 노인들이 많으며 102세 되신 노인이 계시는가 하면 전체 주민 74명중에서 29명이 일혼을 넘게 이곳 대말 터를 지킨 분들이다.
마을 앞산 감남재와 청룡날의 빽빽한 노송은 6백여년 동안 이곳 마을을 지키며 바람을 막고 섰는가 하면 큰 우물앞 청룡들과 방죽밑들, 또랑건너 한들, 덕과 쪽의 기안틀(지만틀이라고도 부름)은 축성 년대를 알수 없는 대말 방죽을 이고 질펀히 누워었다.
본시 일만여평의 방죽은 근동에서 유일한 저수지였으며 사방 일곱자 되는 시암, 생수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정월보름날 밤, 가려움증에 좋다하여 물맞이를 했다는 이강우님의 기억속에 여전히 오늘도 물이 남실거리는 큰 우물, 우물에서 동으로 오백여미터 거리에 정남향의 저수지를 만난다.
처음 저수지를 막은 년대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형묵웅의 중언이다. 아마도 개답하면서 부터 일거라 추측하며 현재 제방에 서 있는 몇그루 노송의 나이로 보아 오백년이 넘었을 거라고 한다.
본시는 수문이 나무로 되어 있던 것을 일제시 보수를 하면서 콘크리트화 하였다는 대말 방죽, 열일곱에 장가를 가서 64년째 해로하고 있다는 노인의 기억은 신바람이 난다.
"전설이 아니었어, 그 옛날에는 놀이터가 있기나 했나, 거그다 옛 날에는날에는 시집가서 재행 하번 다녀오면 말이여 친정에 갈 수가 없었지.
그래서 딸 갖은부모들이 친정 못가는 딸들이 장월(음력 8월)보름후에 모이는 거지. 근동에서 제일 넓은 곳이 대말방죽 제뚝 이었어 모다들 먹을 것을 싸들고 거그 가먼 서로 만날수 있었어. 나는 구경삼아 해마다 제뚝에나가 봤지.
사람들이 어-허떻게 많이 되았는지 아마 이천명은 넘을거여 사람들이 많이 꾀다본게 일제때는 장사꾼들이 생긴거여, 국밥장사도 오고 엿장사도 오고 말여, 거그서 놀기도 허고 경치가 워녕 좋았웅게” 기억을 더듬는 백두옹의 눈가에 이슬이 반짝 빛난다.
처음부터 잔잔한 미소로 노옹의 말씀을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인다. 수백년 이어오던 아름다운 만남의 풍습은 일제말기 전시에 일인들에 의해 없어지고 그 옛날 어려서 이곳으로 춘추에 소풍을 다녀왔다는 이강우님의 회고로 이어진다.
그 분의 어릴때 이곳은 감장사도 있었고 풍선장사, 엿장수도 있어서 그곳에구경가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웬걸? 애초부터 장사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뫼야든게 장사꾼들이 하나둘 들어옹 거지, 우리네 사람들은 장사해서 돈 벌 생각이나 했겄어 ?” 그 옛날 남원 향교에 까지 나다니셨다는 노옹의 기억에 그때는 반가의 자제로 그리할 수도 없었다는 회고이다.
이곳은 해주오씨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일명 둔데기 이씨들이 오랫동안 살아 왔는데 팔월 열엿새날은 덕과, 산서, 동계,‘삼계,지사 근동의 딸가진 부모들, 시어머니들이 모여들어 서로의 안부들 묻는 기회가 되었다 한다.
그 옛날에 갇힌 여인틀의 애환을 위로하는 개방화된 만남의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하니 조상들의 또 다른 지혜가 이난가.
“울울창창한 소나무를 왜놈들이 모다 베어 버렸어, 두 아름씩 되았지. 배를 만든다고 말이여, 조선목 이라고 해서 모다 베어간 거여”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그루의 노송들, 저수지 동편에는 관란정(觀爛亨)이라는 정자가 있어 여름 날 이곳에 앉으면 상큼한 솔향기가 절로 베어 들 것만 같다.
정자 위로 오금사라는 옛 절터가 있다는데 조선 중엽에 폐사된것으로 츠정된다고 한다. 저수지 서편에 있는 칠성암(암석이 일곱개 깔려있음)이 녹음속에 여전히 앉아 있다 관란정 앞에 이끼낀 석불이 파란의 세월을 증명하듯 고즈넉히 가을볕에 졸고 있다.
-김 여 화(수필가)-
-가시연꽃
이 큰방죽 대말방죽에 자생하고 있다.개화시기는 9~10월이고 오전에만 잠깐 피고진다. 볼려면 긍게 아침밥 일쩍먹고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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