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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 행사 모임

[스크랩] 오마이뉴스 기자의 임실 여행기

by 운경소원 2006. 6. 10.

어머니의 소년 시절을 처음 찾아보다

전북 임실군 관촌면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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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3세이신 내 어머니의 고향은 전주시 풍남동이다. 전주시 풍남동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지내다가 임실군 관촌면으로 옮겨가서 소년 시절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전주시 풍남동으로 이사를 해서 처녀 시절을 살고, 내 아버지와 만나 결혼한 후 섬진강댐 건설공사장인 임실군 강진면의 '왼땡이'라는 곳에서 신혼살이를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향인 전주시 풍남동은 지난해 여름(8월 7일) 어머니를 모시고 태안의 두 형제 가족이 함께 찾은 적이 있다.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 성당을 어머니와 나로서는 무려 53년만에 처음 찾아 보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유년 시절과 처녀 시절의 추억들이 어려 있는 '풍남문', '경기전', '오목대' 등을 구경하고 '치명자산'도 올랐다.

그리고 나는 지난해 8월 '53년만에 전주 전동성당을 가다'라는 글을 써서 웹상에 올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두 형제 가족이 함께 어머니의 고향을, 또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 성당을 찾은 것을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된 일로 생각한다.

(그런데 '53년만에 전주 전동성당을 가다'라는 글 중에는 '영세를 받았다'라는 표기들이 두세 군데 있다. 영세(領洗)라는 말에는 이미 '받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세를 했다'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그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역전앞'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습관에 따라 '영세를 받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 점 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리고, 뒤늦게나마 바로잡는다.)

▲ 우리 가족은 지난해 8월 7일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 성당을 찾았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고향인 전주시 풍남동 일대와 치명자산을 둘러보면서 나중에 또 한번 적당을 기회를 잡아 이번에는 어머니의 소년 시절과 신혼살이 시절이 어려 있는 임실군 관촌면과 옥정호 주변을 찾아볼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신털이봉을 아시나요?'라는 글을 써서 <오마이뉴스>로부터 특별 고료(한국관광공사의 30만원짜리 '관광카드')를 받은 다음 구체적으로 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지난달 27-28일 마침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원래는 지난 달 6-7일에 실시하려고 했었다. 8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그 행사를 갖는 것이 한결 뜻이 있을 것 같았고, 6일은 교육 공무원인 아내도 '쉬는 토요일'인 데다가 서울과 논산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이미 전날) 집에 와 있는 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6일 아침부터 제법 많은 비가 내려서 황금연휴를 망쳐 놓았다. 그 바람에 우리 '가족 행사'도 아쉽게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27일은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휴무를 하는 교육 공무원들이 다시 맞는 휴무 토요일이었다. 그 덕분에 딸아이와 아들녀석도 (전날 저녁에) 집에 오는 때였다. 28일 주일은 우리 태안 성당이 '야외 미사' 행사를 갖는 날이어서 나부터 고심을 해야 했고 가족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가족 행사를 또 연기한다고 해서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으므로 그냥 실행을 하기로 했다.

기상 예보는 불안과 상심을 안겨주었다. 토요일 전국적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는 예보였다. 그래도 일요일에는 오전부터 비가 그치고 날이 갤 거라고 했다. 어차피 토요일은 임실까지 가는 일만 할 터이므로, 일요일의 갠 날씨를 기대하고 그대로 실행하기로 했다.

어머니의 소년 시절과 신혼 시절이 어려 있는 곳을 처음 찾아가는 이번의 가족 행사에는 모두 10명이 함께 했다. 두 조카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가족 7명에다가 경기도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과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 모녀가 동참을 해주었다.

지난해 가을 이번의 가족 행사 계획을 처음 세울 때 그 의논 자리에 함께 했던 가운데 제수씨는 해가 바뀌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해서 이번 행사에 함께 하지 못했다. 아내를 잃은 상황에서도 이번 가족 나들이에 함께 하기로 했던 동생도 막상은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족 나들이를 하다 보면, 세상 떠난 아내 생각이 더 많이 나고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다며 자신은 빠지겠다고 했다. 동생의 그 마음이 이해되어 강요를 할 수가 없었다.

▲ 전주 풍남문 앞에서... 어머니의 고향을 처음 찾아보는 지난해 여름의 가족 나들이 행사에는 동생도 함께 했는데...
 
나는 안산에서 한의원의 사무장으로 일하는 가운데 누이동생을 이번 행사에 꼭 참여시키고자 했다.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보는 뜻있는 행사이기도 해서지만 제수씨가 없는 그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워보려는 심산이었다. 막상 또 다시 먼길 가족 나들이를 실행하려고 하니 더욱 제수씨 생각이 나면서 심정적으로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또 누이동생이 열두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전주를 가 본 그 40년 전의 기억을 흐릿하게나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려 40년만에 다시 친정 어머니의 고향을 찾는 남다른 감회를 누이동생에게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탓이기도 했다.

내가 다가오는 여름방학도 무시하고 굳이 5월의 주말을 택해 이번 가족 나들이를 실행한 것은, 한의원의 중간 관리자인 누이동생에게는 여름방학이라는 것이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또 누이동생이 며칠 휴가를 얻게 되는 여름에는 우리 가족의 일본(큐슈 지역) 여행이 예정되어 있기 까닭이었다.

누님의 동참은 다소 뜻밖이었다. 딸을 다섯이나 낳아 키웠어도 살림 도와주는 딸자식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출가하여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근처 딸들의 살림을 도와주어야 하는 형편이니 누님은 환갑을 자신 나이에도 도무지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누님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 누님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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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제외한 태안의 일곱 식구는 오전 10시쯤 출발, 덕산온천을 들른 다음 안양으로 갔다. 누님 댁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태안에서 사 가지고 간 해물로 누님이 이틀 동안 집 식구들이 먹을 꽃게탕과 붕장어포볶음 만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안산으로 이동했다.

안산에 도착할 때쯤 제법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누이동생이 일하는 한의원을 쉽게 찾을 수 없어 우중에 시간을 많이 소모하며 안산 시내를 헤매다가 한양대역 앞에서 겨우 누이동생 모녀를 만나 차에 태우고 4시 30분 쯤 임실을 향해 출발을 했다.

▲ 지난해 여름, 53년만에 다시 찾은 전주 전동 성당 안에서 미사보를 쓰시려는 어머니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를 넘어서니 비도 오지 않고 도로도 전혀 젖어 있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동군산 IC를 거쳐 전주로 들어서니 다시 비를 보게 되어 혹 내일까지 비가 이어지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었다.

토요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리라는 기상 예보 덕분에 토요일 오후의 고속도로가 그다지 막히지 않았는데도, 안산에서 임실까지는 4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8시 40분쯤 임실군 관촌면에 도착하여 우리를 안내해 주기로 한 여성 작가 김여화(한국문인협회 임실지부장)씨를 만났다.

김여화씨의 안내로 '신선대관광지' 안의 한 음식점으로 가서 메기탕으로 늦은 저녁을 먹은 다음 면소재지인 관촌리로 다시 와서 미리 예약을 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 세 개를 얻었다. 한 방에는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 어른들이 들었다.

엄마가 없어 알게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 있을 텐데도 올해 열 살인 내 조카딸 규빈이는 색다른 곳에서 잠을 자게 된 것이 괜히 설레는 기분을 갖게 하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와 두 고모와 큰엄마가 있는 방에도 들어와 보고, 큰아빠와 두 오빠가 있는 방도 들여다보고 하는데 완연히 들떠 있는 기색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계신 방에 가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 가족이 어머니의 소년 시절이 어려 있는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 와서 비록 여관방에서나마 하룻밤을 지낸다는 것은 정말 즐겁고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물론 처음으로 가져보는 일이었다. 지난해 여름 어머니의 고향 전주시 풍남동과 전동 성당을 찾았을 때도 당일치기 나들이여서 잠을 자지는 않았다.

또 안산의 누이동생은 지난 2004년 여름 우리 가족이 어머니 모시고 중국(북경/만리장성) 여행을 할 때 동참을 한 경험이 있지만 누님은 출가한 후로 친정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하며 여관방에서 잠을 자는 일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누님의 감회가 누구보다도 클 터였다.

어머니는 전주시 풍남동에서 임실군 관촌면으로 이사를 한 유년 시절의 기억은 거의 없다고 했다. 관촌에서 몇 년을 살고 다시 전주시 풍남동으로 이사를 한 소년 시절의 기억은 또렷하다고 했다.

▲ 지난해 여름, 처녀 시절의 추억이 어려 있는 전주 '경기전' 뜰에 앉아 어린 손녀의 재롱을 보시는 어머니
 
소달구지 하나를 얻어서 고리짝 등 가재 도구 몇 가지를 싣고, 꽁보리밥을 지어서 큰 바구니에 가득 담아서 싣고 길을 떠났다고 했다. 어린아이였던 내 작은 외삼촌만 소달구지의 이불보따리 위에 앉아서 가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물론이고 큰 외삼촌과 두 이모와 어머니는 50여 리 길을 걸어서 갔다고 했다.

세월아 네월아 하며 느릿느릿 가는 소달구지를 따라 걷다가 점심때 소달구지를 세우고 길가 풀밭에 가족이 둘러앉아 풋고추에 된장을 발라 꽁보리밥을 먹던 기억이 절로 떠오른다고 했다. 그 꽁보리밥이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간다고 했다.

원래 임실군 신덕면의 활꼬지(弓高地/오곡리)라는 동네에서 천석지기 부농으로 사셨던 외할아버지가 가산을 모두 잃고 전주시 풍남동에 거처하게 된 사정, 임실군 관촌면으로 이주했다가 몇 년 후 다시 전주로 이사하게 된 사연들을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소년 시절 추억들이 어려 있는 관촌면의 한 여관방에서 누님과 누이동생, 그리고 마누라와 함께….

생각할수록 의미 있고 재미있는 시간이요, 장소였다. 우리 부부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누님과 누이동생으로부터 치사를 듣는 것도 우리 부부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어머니의 신혼 시절을 처음 찾아보다

옥정호의 풍경 속에는 아버님의 청춘 시절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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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전북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서 5월 28일의 아침을 맞았다. 눈을 뜨는 즉시 여관방의 창문을 열어보니 아직도 비는 약하게 내리고 있었지만 곧 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상 예보가 정확히 들어맞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족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각은 일정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깨우지 않으면 무한정 잠만 잘 눈치였다. 어른들은 여관과 함께 있는 대중 목욕탕에서 무료로 목욕을 하며 임실 물이 좋은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전날 덕산온천에서 목욕을 했지만 임실 관촌 물을 다시금 온몸으로 접해보고 싶으신지 기꺼이 목욕탕을 찾으셨다.

안산의 누이동생이 준비해온 샌드위치와 빵으로 여관방에서 가볍게 아침 요기를 하고, 아이들을 깨워 9시쯤 여관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우리는 차에 오른 다음 먼저 관촌면 소재지인 관촌리, 즉 읍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나는 어머니께서 소년 시절에 사셨던 곳을 기억하실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그 동네 모습이 이미 예전에 지워진 듯했고, 그 동네의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다음에는 사선대(四仙臺) 관광지를 찾아보았다. 사선대 역시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있지 않았다. 사선대가 1985년에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고 조성되었으니 어머니가 사셨던 70년 전에는 그냥 그 이름과 자연 사물로만 겨우 존재했을 터였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곳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사선대의 모습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흐린 날씨와 안개 때문에 사선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 임실 성당 앞에서 가족 모두 함께
 

그리고 우리는 임실읍으로 향했다. 임실읍 이도리에 있는 임실 성당에 가서 주일 교중미사를 지내기로 했다. 어머니는 소년 시절에 언니와 함께 '관촌 공소'을 다니셨다고 했다. 정미소 집의 방을 얻어 천주교 공소를 차린 두 분의 '전도부인'에게서 교리를 배웠다고 했다.

그래서 나부터 관촌 공소에서(옛날의 그 정미소 집은 아닐지라도) 미사를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관촌에 공소가 있고, 공소에서도 주일 미사가 있다는 말을 아침에 여관 주인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확인하니 관촌 공소의 주일 미사는 아침 8시 30분에 지낸다고 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임실 성당은 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다. 외국인 신부님이 지으셨을 것 같은 모양새가 고풍스런 느낌을 주었다. 때가 때인지라 어깨에 띠를 두른 이들이 우리 가족에게도 다투어 인사를 하며 명함을 주었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가 왠지 미안해서, 졸지에 임실 주민이 된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성모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표해 주신 신부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신부님은 미사 중 '공지 사항' 발표 시간에 우리 가족을 소개하시며 박수 선물을 안겨 주셨다. "멀리 충청도 태안에서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오신 가족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더욱 고마운 마음이었다.

▲ 임실 성당의 맨 앞자리와 두 번째 자리에 앉아 미사를 지내고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한국문협 임실지부장 김여화 선생이 와 있었다. 우리 가족은 김 선생의 안내로 성당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부터 했다. 전날 저녁에 김 선생이 선물해주신, 머루로 손수 빚었다는 맛 좋은 와인을 어머니와 누님도 즐기며 식사를 했다.

임실 읍내의 한 가게에서 유명한 '임실 피자'를 한 상자 사고, 변두리에 있는 치즈 공장으로 가서 일찍부터 명성을 알고 있는 '임실 치즈'도 구입한 다음 우리 가족은 김여화 선생의 승용차를 뒤따라 강진면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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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우리가 도달한 곳은 '섬진강댐'이었다. 우리 가족이 김여화 선생에게 부탁하여 특별히 섬진강댐을 찾은 것은 정말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섬진강댐은 섬진강 상류인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에 놓인 댐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상류 쪽으로 2km쯤 더 올라간 강진면 옥정리에 1929년에 조성된 '운암댐'이 있었다고 한다. 40m 높이의 취수댐이었다고 한다.

▲ 섬진강댐 앞에서 한국문협 임실지부장 김여화 선생으로부터 재미있는 설명을 듣고
 

그 운암댐으로부터 하류 쪽으로 2km 내려온 현 지점에 새로운 댐이 처음 건설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이 섬진강댐의 건설로 기존의 운암댐은 완전히 수몰되었다고 한다. 노령산맥 줄기 사이인 임실군 운암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상류 물을 막은 섬진강댐은 6km 떨어진 반대쪽인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로 물을 넘겨 1945년 4월 불완전하게나마 '칠보발전소'란 이름으로 발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발전은 완전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1948년부터 다시 공사를 추진하던 중 6·25 전쟁으로 발전소 설비의 80% 이상이 전화를 입어 가장 피해가 심한 발전소가 되었다. 1951년 제1호기를 완전 복구했고, 1961년부터 칠보수력발전소를 '섬진강수력발전소'로 개칭했다.

섬진강수력발전소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오늘의 섬진강댐은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전국의 부랑인들을 모아 구성한 '국토건설단'을 투입, 65년에 공사를 마친 중력식 콘크리트 댐이다(이미 <운암강>이라는 장편소설을 가지고 있는 김여화 작가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1940년에 섬진강댐의 최초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운암댐을 대신하는 섬진강댐 건설 공사가 1940년 처음 시작된 덕분에 내 아버님이 청년 시절 이곳에 몸을 놓을 수 있었고, 또 그 덕분에 내 어머니와 만나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신혼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섬진강댐에서는 아찔한 기분도 느꼈다.

 


내 아버님께는 두 분의 형님이 계셨다. 장형님은 결혼까지 한 청년 시절에 양친을 잃고 많은 농토를 도맡게 되었으나 어찌어찌하다 모든 가산을 잃고 매우 곤궁한 처지가 되었다(내 증조부님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많은 돈을 바치고 '통정대부'라는 작호를 받았을 정도로, 우리 집은 원래 향리에서 꽤 큰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내 아버님은 소년 시절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님의 중형님은 꽤 활동성이 있으셨던 분 같다. 이 분이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객지를 떠돌다가 전라북도 임실 땅의 섬진강댐 건설공사장에 안착을 하고 고향의 형님과 동생을 불렀다고 한다.

거기에서 필체가 썩 좋으셨던 내 백부님은 사무실 안에 편히 앉아 사무 보는 일을 하고, 중백부님은 댐 공사장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 오는 일을 하고, 어버님은 공사장 인부들에게 품삯(주로 쌀)을 배급해 주는 일을 담당했다고 했다.

그때 공사장의 사무를 보는 사람들 중에 전주시 완산동에 집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 분이 충청도 서산에서 온 삼형제를 좋게 보았고 특히 막내인 총각 청년을 눈여겨보았다. 자기 처제를 생각하고 중신을 해볼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분의 중매 덕분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1944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섬진강댐 건설공사장 부근인 '왼땡이'라는 마을에서 작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신혼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몸속에 내 누님을 갖게 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섬진강댐 건설 공사가 중단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주시 풍남동, 어머니의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분의 내 백부님들은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고….

▲ 60여 년 전 신혼 시절의 풍경을 기억해 보며 섬진강댐 위를 걸으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섬진강댐 부근에서 살던 시절에 누님을 가지셨다고 했다.
 

그러니까 섬진강댐에는 내 아버님의 청년 시절 땀방울이 어려 있는 셈이었다. 또 두 분 백부님의 숨결도 담겨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댐 부근 어딘가에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혼 시절, 60여 년 전의 그 감미로운 설레임이 수놓여지고 몇 섬이나 될지 알 수 없는 깨소금들이 흩뿌려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높이가 64m나 되는 섬진강댐 위에서 사면 팔방 어디를 살펴보아도 '왼땡이'라는 마을은 없는 것 같았다.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싶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감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신혼 시절로부터 60여 년이 흘렀으니, 또 섬진강댐의 규모가 커지고 변모하면서 왼땡이라는 마을은 이름도 실체도 자연 유실이 되었을 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혼 시절이 수놓여진 왼땡이라는 마을은 흔적조차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섬진강댐을 60여 년만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어머니께 남다른 감회를 안겨주는 듯싶었다. 어머니는 몸소 가파른 계단을 타고 댐으로 내려갔고, 344m에 이르는 긴 댐을 두 발로 걸으며 맘껏 감회를 즐기시는 눈치였다.

어머니의 뿌리 마을을 처음 찾아보다

옥정호에서 활꼬지마을까지 아름다운 여행

섬진강댐 옆에서 우리 가족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맛 좋은 ‘임실 피자’를 잠시 즐긴 다음 다시 이동했다. 운암대교를 구경한 다음 곧바로 ‘옥정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는 ‘국사봉’으로 향했다.

‘운암호’로도 불리고 ‘갈담저수지’로도 불린다는 옥정호는 전국의 수많은 호수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정평이 나 있다고 했다. 전체적으로도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특히 국사봉에서 보는 경관이 아름다워 국사봉은 사진작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국사봉에서 찍은 듯한 사진들을, 옥정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나는 오래 전부터 웹상에서 익히 보아 올 수가 있었다.

▲ 옥정호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국사봉’으로 오르는 계단 길. 이 계단 길을 어머니는 너끈히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누님에게 가려졌지만...
 
섬진강댐의 건설로 옥정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생겨나면서 기존의 운암댐은 물론이고 정읍시와 임실군의 5개 면 22개 리(92.95㎢)가 수몰되었다고 한다. 옥정호의 총 저수용량은 4억 600만 톤이고,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26.51㎢이며, 유역 면적은 763㎢라고 한다. ‘산업기지개발공사’에서 관리하며, 영농기인 4월 11일부터 9월 11일까지 동진강 유역인 김제, 정읍, 부안, 계화도 및 임실군 하류 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한다.

그리고 옥정호의 물을 6km의 수로를 통해 이용하는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섬진강 수력발전소는 151.7m의 고낙차를 이용하여 1990년 이후에는 1억 7,400만kWh의 전력을 생산한다고 한다.

옥정호의 허리쯤에 위치하는 국사봉은 콘크리트 계단과 나무 계단이 꽤 높았다. 100m는 되어 보였다. 그 계단을 어머니는 문제없이 올랐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누님은 “누가 어머니를 보고 여든이 훨씬 넘은 노인네로 본대요”라면서 좋아했다.

국사봉에서 바라보는 옥정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진으로만 보던 경관을 직접 눈으로 보는 감회는 실로 컸다. 하늘이 쾌청하지를 못해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 아쉽고 섭섭했지만 우리 가족은 옥정호의 경관에 감탄하며 맘껏 사진을 찍었다. 사진작가들의 촬영 작업을 방해하는 듯싶어 미안한 마음도 가지면서….

국사봉을 내려와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본 것은 임실군 신평면에 있는 ‘용암리 석등’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용암리 석등은 우리나라의 모든 석등들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현 문화재청장)가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마지막으로 신덕면 오곡리의 ‘활꼬지(弓高地)’ 마을을 찾았다. 옛날에는 높고 긴 고개 때문에 들고 나기가 매우 어려운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 고개를 낮추고 확·포장을 해서, 그 길 덕분에 이제는 오지가 아니게 되었다고 했다.

활꼬지 마을은 어머니의 친정이 있던 곳이었다. 활꼬지 마을 대부분의 땅이 내 외할아버지의 재산이었을 정도로 외조부는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조부 자신이 땀으로 일군 재산이 아니었다. 부모로부터 거저 물려받은 재산이었다.

▲ 우리 부부도 국사봉에서 옥정호를 본 증거를 만들었다. 아내는 풍만한 몸매 때문에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러 명의 머슴을 두고 불로소득을 누리며 편안히 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외조부는 전주로 한양으로 기방 출입을 일삼았다고 한다. 또 기방을 출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생과 하룻밤을 자면서 기생 치마폭에 논문서와 집문서를 넝큼넝큼 안겨주곤 했다.

거기다가 친구에게 크게 사기도 당하여 삽시간에 가산을 모두 잃고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만주의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준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많은 재산을 다 날렸으니, 내 외조부는 그리 똑똑한 분은 아니셨던 것 같다.

가산을 모두 잃고 알거지 신세가 되어 전주시 풍남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똥구멍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가족들을 고생시킬 때는 후회와 한탄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어쩌다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전에는 말을 타고 넘던 재를 두 발로 걸어서 활꼬지 마을을 갈 때는 손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저 논도 내 논이었는데…. 저 산도 내 것이었는데…”하고, “에그, 이 애비가 못난 탓에 너희들을 고생시키는구나. 불쌍한 내 새끼들…….”하며 눈물을 지으시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시금 그 얘기를 하며 한숨을 쉬셨다. 이제는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마을 모습을 둘러보시기는 했지만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쩌면 작은 아버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활꼬지 마을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오래 소식이 끊긴 상태여서 찾아보는 일도 쉽지 않을뿐더러 면구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활꼬지 마을을 떠나 전주 방향으로 재를 넘었다. 그리고 삼거리에서 김여화 선생과 헤어졌다. 김여화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 한량없다. 우리 가족을 환대해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많은 시간과 노고를 무릅쓰고 몸소 안내를 해주셨다. 임실의 향토사 관련 저술도 많이 하신 분답게 임실군의 구석구석을 두루 훤히 알고 있었다. 정말 김여화 선생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들을 모두 쉽게 갈 수 있었고 이런저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김여화 선생과 헤어져 전주 쪽으로 방향을 잡은 우리는 다시금 전동 성당을 보게 되었다. 지난해 어머니의 고향을 찾으면서 일차 와 본 곳이지만, 지난해의 가족 나들이에 함께 하지 못한 누님과 누이동생을 위해서였다. 누님으로서는 무려 54년만에 세례를 받은 성당, ‘신앙의 고향’을 찾은 셈이었다.

우리는 오후 5시쯤 전주를 출발, 논산에서 내 아들 녀석을 내려주고 천안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지난해 두 번이나 동생 부부도 함께 왔던 음식점이라 마음 아픈 얘기도 하면서….

▲ 내 외조부의 뼈아픈 사연이 어려 있는 임실군 신덕면 오곡리 ‘활꼬지’ 마을 풍경
 
그리고 천안역 앞에서 누님과 누이동생 모녀와 내 딸아이를 내려주었다. 원래는 내 차로 안양이나 안산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일요일 오후의 고속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누님과 누이동생의 만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천안역 앞에서 헤어지면서 누님과 누이동생은 내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누님은 “동생과 올케 덕분에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보는 참으로 뜻있는 여행을 했다”며,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더 고마웠다. 사실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했다. 전주 출신으로 충청도 촌구석 남자와 결혼하고 고향을 떠나 줄곧 충청도 태안 구석에서 살아오신 어머니 덕분이었다. 남편의(또 아들의) 무능과 가난과 만고풍상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오신 어머니, 여든이 훨씬 넘으신 연세에도, 몇 년 전에 대장암 수술까지 받으신 병력(病歷) 속에서도, 최근에 며느리 하나를 앞세운 슬픔 속에서도, 엄마 잃은 어린 남매를 맡아서 보살피시는 어려움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주시는 어머니 덕분이 아닐 수 없었다.

누님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큰 행사를 잘 마쳤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늦은 밤까지의 긴 운전에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했다.

물론 감사 기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북 실향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지난해와 올해, 두 번에 걸쳐 어머니의 고향과 과거의 시간들을 찾아보는 가족 행사를 가졌다. 비록 50년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실행한 일이지만, 어머니의 고향을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하지만 이북 실향민들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고향을 품속에만 한처럼 끌어안은 채 애달프게 살고 있다.

우리는 진심으로 이북 실향민들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 겨레가 하루빨리 평화 통일을 이룩하여 이제는 황혼 시절을 살고 있는 이북 실향민들이 황혼 속에서나마 고향을 찾아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할 때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찾은 음식점과 그 음식점의 종업원들을 위한 ‘청원’도 잊지 않는다.)
▲ 지난해 여름의 ‘가족 행사’에 함께 하지 못했던 누님은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전주 전동 성당을 54년 만에 처음 와보게 되었다.
출처 :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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