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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도자료

기록조차 없는 유물들 신흥사

by 운경소원 2014. 2. 4.

2010년 03월 08일(월) 20:10 [주식회사 임실뉴스]

↑↑ 1980년대의 신흥사 대웅전

 금강역사상 2기 그리고 나한상 6기 연구재조명 필요

신흥사 대웅전 양측에는 우람하고 아담한 금강역사상이 눈알을 부라리며 손님을 맞이 한다.

증언에 따르면 이 금강역사상은 레일이 설치되어 문을 열면 달려와 사람 앞에 우뚝서 이곳을 찾는 분들은 무서운 사자로 전해오고 있다. 관촌면 상월리 360번지에 자리한 신흥사 대웅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지난 1985년 8월 16일 지정됐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2간, 단층 맞배지붕으로 백제성왕 529년에 창건했다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신흥사는 관촌소재지에서 상월리까지 약 9km 들어가며 상월마을(절골) 사자산(522m)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 백제 성왕때 진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4백평의 사찰 건물과 3백여명의 신도가 있었던 큰 사찰이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관촌역에서부터 절까지 가려면 거의 절이 소유한 전답을 밟고 가야 했다고 할만큼 큰 사찰이었지만 최근에 쇠락해 이곳을 찾는 발길조차 없다.

백제 성왕 7년(529)에 건축되어 그후 여러 차례 중건했지만 대웅전등 주요건물은 창건당시 백제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다.

창건당시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정문, 요사가 김제의 금산사에 견주었다.

대웅전의 기단은 자연석이며 초석도 역시 자연석 주초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뚜렷하다. 우주는 다른 기둥에 비해 매우 강하다.

전체적으로 보아 기둥의 높이가 평면 규모에 낮음으로 해서 지붕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인다.

정면의 문은 어칸이 4분합의 빗살문이며 협칸은 각각 3분합의 빗살문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둘렀으며 그 아래 공포는 다포식으로 내외 2출목이며 어칸에는 공간포가 2개, 협칸에는 1개씩 있고 저공의 끝은 앙설로 조각적 수법은 그리 화려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단청으로 보완해 단순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창방머리는 보아지(梁奉)형식의 곡선, 장식을 했고, 단청 역시 초화문으로 하였다.

체적으로 보아 측면의 폭이 넓은 편이며 그 중 어칸이 특히 넓어 내진의 공간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또, 측면 풍판의 마무리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있는 점이나 측변의 너새도 정면과 같이 새들로 단정히 정리한 것으로 보아 측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듯하다고 전한다.

▲아금강역사상-보통 사찰의 좌우에 두 신을 마주보도록 배치했는데 이는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입을 벌리고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상으로 아금강상(阿金剛像)이다.

▲음금강역사상-입을 꽉 다문 채 주먹으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은 음금강상(?金剛像)이다.

인왕은 금강역사와 밀적역사(密跡力士)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이는 같은 개념에서 부른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아금강상 ↑↑ 음금강상

▲내가 본 신흥사의 금강역사상

신흥사의 금강역사상은 대웅전(大雄殿) 안에 있는데, 중생이 성스러운 대웅전의 양측에 세워 대웅전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본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이다.

2기의 아금강역사상은 크기가 약간 다르다.

왼쪽은 총 높이115㎝, 어깨너비 65㎝, 어께뒤편 78cm 허리둘레 100㎝ 좌대 가로너비 58㎝이고, 세로너비48㎝, 대좌두께10㎝이다.

음금강상 왼쪽은 총 높이117 ㎝, 어깨너비60 ㎝, 허리둘레 95 대좌 가로너비 63㎝이고, 대좌세로 43cm 대좌 두께 8㎝이다.

대형 통나무에 이음새 없이 조각해 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신체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조각품들이다.

조선시대 신흥사 중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의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드물게 나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귀중하다.

다른사찰의 것과 비교하면 신흥사의 금강상은 더 아름답고 중후하다.

▲법지스님이 말하는 신흥사의 사적기


신라 진감국사에 의해서 창건된 신흥사는 A.D 529년 백제 성왕9년애 창건되었고 그후 삼국 고려, 조선 상고사의 기록이 없고 가장 오래된 기록은 대웅전 상량문기록으로 A.D 1712년 (康熙 51년)중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량문 전문(0000)

당시 주지스님은 가선대부 경민 스님으로 불상 조성은 건륭 8년 (건륭제8년) A.D 1743년 조성되었고 라한전의 나한상도 그 무렵에 조성되었는데 정확한 기록은 남기지 못했다고 명시됐다.

(初辨佛相羅漢造成時年月 日不書記. 錄故後生人不知耳己也 )

대웅전 개보수는 1915년 한차례 더 중수했으며 지금 현존 대들보가 그때 당시 목재로 남아있다.

(대정4년 1915년) 그리고 1983년 또 보수를 한바 있고 최근 2008년 7월 다시 보수를 하였다. 요사채는 2004년 11월 신축했다.

이와 같이 중수기는 1712년 가선대부 경민스님 당시에 상량문에 올려져 있었다는 것.

이는 지금으로부터 297년전으로 조사문에 기록되어 있다.

나한 조성은 297년 전에 이미 조성된 것으로 당시 몇분의 나한을 모셨는지는 알수 없으나 최병선씨의 기억으로 36기(황점식님도 같은증언)라고 했는데 이 나한들이 현재 신흥사에 있는지 궁금하다.

그 많던 나한상들은 모두 밀반출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법지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나한존자는 여섯분이다. 흥사의 창건연대가 말해주듯 분명 역사적으로 유물의 있으면 좋은데 사정은 그렇지 못한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인지 신흥사의 유물들은 도둑이 노리는 표적이 되어왔다.

수년전에도 이들 금강상은 선운사 박물관에 보관한다고 해 유출이 되어 주민들이 나서서 되찾아 제자리에 있다.

또 영허선사의 부도도 도둑맞았다가 되찾아왔다.

신흥사에 유물은 신흥사에 있어야 빛을 낸다.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신흥사의 것이 아니다.

하루빨리 유물들을 연구 재조명해 기록으로 남겼으면 한다.

임실군에서 가장 오래된 백제고찰, 신흥사, 무관심속에 사라져 가는 사찰의 유물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지 궁금하다./김여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