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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햇살속에서 건진 행복

by 운경소원 2006. 3. 9.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햇살이 맑은 날에는




김여화




  여자가 되고 싶다. 신혼의 풋풋했던 꿈을 떠올려보면 날마다 가지런히 정돈된 살림살이를 윤기 나게 닦고나 서 검지만 깔끔한 마루에 앉아 색진한 커피 한잔 작은 쟁반위에 놓고 햇살을 받으며 미소가 만발한 한나절을 맞이하곤 했었다. 이웃의 수다쟁이들 다 불러 앉히고 쓸데없는 잡사를 화제로 올리며 그냥 그렇게 햇살을 내 하루 일과에 버무리며 살던 그때는 그게 행복이었다.


  이런 풋 봄의 햇살은 참으로 따뜻하다. 쾌청한 맑은 햇살이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는 아침, 벌써 여러 날 째다. 아기와 놀게 된 것이. 말이 논다고 하는 것이지 아기 보랴? 밭매랴 하면 밭을 맨다는 옛말처럼 아기 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고 말을 할 줄 알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두세 번 많아야 다섯 걸음을 떼는 갓 돌 지난 아기인지라 연일 밤낮으로 씨름을 하게 된다. 다행인 것은 아기가 할미인 내 품을 좋아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지만 할머니라는 핏줄의 인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따른다는 것만도 천만다행 아닌가. 아침 햇살이 말갛다. 거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아기도 눈치를 챈다. 자꾸만 업고 나가자는 시늉이다.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는 것도 등 뒤로 돌아가 업어 달라는 표현도 확실하다. 떼를 쓸 때는 싫다는 표시로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기도 하고 아기의 맑은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다.


  먹을 것과 놀 것이 겨우 구분되는 이 녀석은 며칠씩 제 어미와 아빠를 떨어져 있었는데도 용케도 알아보고는 만나면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내가 아이를 기를 적에는 업고 농사일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었는데 요새는 아기를 업고 무얼 한다는 것이 곤욕이다. 허리도 아프지만 이제는 뒤로 잘 돌아가지 않는 팔 때문에 어께는 물론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게는 할머니라는 단어가 제격이지 싶다.


  아침부터 청소를 시작한다. 별수 없이 등 뒤로 돌아가 업으라는 녀석을 업고 의자에 올라가 구석구석을 닦고 먼지를 털어낸다. 애초부터 나는 살림을 대충하는 편이다. 남보다 깔끔하지도 않고 또 뭐든 묵은 것은 버리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집안팍이 구질구질하기 마련이다. 손때 묻은걸 버리지 못하는 성미는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 집은 아무리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을 해도 집안팍이 개운치 않다.


  꼬멩이녀석은 제 손에 닿는 책장 앞에 있는 많은 물건들을 모두 만져보는데 안된다고 소릴 지르면 그대로 포기를 하고 만다. 한번 혼쭐이 나면 그 물건에 대해서는 다시 만지고 손장난을 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말귀를 조금씩 알아듣는다는 말이다. 제 잘못에는 울지도 않고 주눅이 들어 가만 앉아있는 것이 어쩔 땐 안쓰럽기도 하다.


  엊그제도 아기를 재워놓고 부엌살림을 만지며 청소를 했다. 치워도 치워도 늘 어지러놓은 물건이나 방안은 마찬가지지만 오랜만에 아기랑 마음 다 잡아 청소를 하는 마음은 한가롭기만 하다. 마치 이제 첨으로 살림을 하게 되는 주부초년생처럼 깨끗하게 치워놓고 바라보는 마음은 행복하다. 늘 직장과 살림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뭐든지 대충 대충 이었는데 요새는 아기와 놀다보니 새삼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온다. 탁자를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싫증이 난 물건들을 뒤꼍으로 내다 놓는다.


  맑은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서 청소를 하다보니 신접살림을 나고 살림살이에 재미를 붙이던 때가 생각난다. 가끔씩 햇살이 가득한 화단을 내다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고 이따금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큰 길에 지나가는 차를 구경하는 것 마저 재미있다. 두 달이라는 무급휴가가 주는 오랜만의 여유다. 아기가 없을 때는 앞산에 올라 동네를 굽어보며 산 능선을 세어가며 멀리 멀리 여행을 떠나는 재미도 있다.


  비로소 여자가 되어 주부로서 당연한 일상이 문득 처음처럼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맑은 햇살 때문 일 것이다. 가끔씩 이렇게 맑은 햇살아래서 발갛게 우러나는 장항아리를 열어보는 맛도 재미지고 골짜기를 훑어 내려가는 봄바람에도 흥이 난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고 등에서 쌔근쌔근 들리는 아기의 숨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햇살이 맑은 날에는 비로소 아낙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