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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전씨 상월리 종중

[스크랩] 녹두장군 특집기획 전북일보 2014. 2.11

by 운경소원 2014. 2. 13.

   
▲ 천안전씨 문중이 1954년 고택 부근에 세운 단비.
 

동학농민혁명군 후손들의 피폐한 삶은 지도자들의 후손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체포된 지도자들 대부분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그 가족들은 오랫동안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을 달고 다녀야 했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당장 연명조차 버거웠고, 관의 감시와 주변의 눈총 또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4년에야 특별법 제정으로 명예회복과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110년은 그 후손들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 가난의 대물림에다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도 안된 이들에게 지도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차라리 사치였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김덕명 장군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선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들여다본다.

   
▲ 전봉준

전봉준 장군(1855~1895)을 제쳐놓고 동학농민혁명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백산대회(1894년 음력 3월26일~3월29일)에서 총대장으로 추대된 후 내내 혁명의 중심에 섰던 최고 지도자였다. 그를 기리는 시설물들이 그의 행적을 따라 정읍과 고창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설치돼 있다. 그가 태어난 고창 당촌(고창읍 죽림리)에 생가가 만들어졌고(2000년), 혁명 당시 살았던 정읍 이평면 장내리의 고택은 사적지로 지정돼(1981년) 관리되고 있다. 동상 혹은 부조 등으로 그를 형상화 한 조형물도 10여곳에 이르며, 그의 이름을 딴 ‘전봉준공원’(정읍 내장산 입구)까지 조성됐다. 선조묘와 부모묘도 천안전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당시 역사가 재조명되고 재평가 받으면서 전봉준 장군이 이렇게 기려지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직계 가족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베일에 쌓인 가계

사실 전봉준 장군의 생애 자체가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1차적 자료라고 할 그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내용들은 재판당시 진술과 구전 등으로 알려진 정도다. 그가 고창 당촌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은 오지영의 〈동학사〉(1940년)에 나온 내용으로, 고창의 향토사학자 이기화씨가 천안전씨 족보와 구전 등을 통해 확인했다.

가족 상황 역시 명확하지 않다. 직접적인 자료는 1차 재판에서 진술한 6명이라는 게 전부다. 부인과 자녀 4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정읍의 향토사학자 최현식(1923~2011)씨는 생전에 전봉준 장군의 가계(家系)를 추적했다. 그는 2남 2녀중 장녀 전옥례 여사(1880~1970)를 만나 들은 증언을 〈갑오동학혁명사〉에 담았다. 증언자인 전 씨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진안 마이산으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변성명하고 금당사 공양주로 지내다가 23세에 결혼, 두 아들을 두었다. 전봉준 고택은 자신이 어려서 살았던 집이라고 했으며. 그동안 숨어 지내다가 갑오동학혁명제가 열리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는 것이다. 장남(용규)은 손을 두지 않고 사망했으며, 차남(용현)은 행방불명, 차녀(성녀)는 고택 부근에서 살며 결혼해서 딸을 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가족관계를 증명할 만한 기록이나 주변의 증언이 뒷받침 되지 않아 직계 후손에 대한 사실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특별법 제정에 따라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벌인 유족 심사에도 4~5명이 전봉준 장군의 후손이라는 유족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증빙 자료가 없을 뿐더러 전봉준 장군의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전자 감식 등으로 판별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국회서 학술대회 계획

직계 가족이 없는 상황에서 천안전씨 차원에서 전봉준 장군이 기려지고 있다. 고창과 정읍지역 천안전씨 문중은 갑오년 1주갑인 1954년 고택 부근에 단비를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낸다.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고 쓴 이 단비는 김제 출신의 역사학자 김상기 박사(서울대 교수 역임)가 명명했다. 종중에 의해 설립됐지만, 장군이‘민주’투사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한 첫 시설물인 셈이다. 종중은 이 단비의 역사성을 들어 사적지나 문화재로 등록되길 바라고 있다.

묘지 관리와 제사는 계손(系孫)인 전만길 씨가 50년간 관리했으며, 현재 그의 아들인 전성준 씨(54, 서울서 사업)가 2004년 작고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봉사손이 되었다.

전 씨는 “아버지는 글자도 모르는 분이었지만 끌림과 혈족이라는 확신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50년간 제사를 지내셨다”고 말했다.

장군의 제사는 100주년 때부터 천안전씨 대종회 차원에서 기일인 매년 양력 4월24일 시향제로 치러지고 있으며, 시향제에는 200~300명이 참여하고 있단다.

천안전씨 대종회는 지난해 전봉준장군유적보존회를 사단법인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 장군을 기리는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법인 이사장을 맡은 전해철 씨(81)는 기존의 시향제를 올해부터 국민적 추모제로 치르고, 국회에서 학술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의 학술대회는 집강소를 통해 풀뿌리민주주의를 시도했던 그 정신을 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전 이사장은 충남도로부터 승인을 받아 천안전씨 중심으로 법인이 시작됐지만, 향후 전국적인 모임이 될 수 있게 지역별 지부를 만들어 문호를 활짝 열 계획이라고 했다.

전봉준 장군을 기억하고 기리는 활동들이 이렇게나마 이루어져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삶을 꿈꿨던 장군의 정신은 시설물이나 제사만으로 기려질 수 없다. 또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작정의 미화도 장군을 욕되게 한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 선친 이어 전봉준 장군 제사 모시는 전성준 씨 "서울에 전봉준 장군 동상 서는 날 올 것"

   
▲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전해철 이사장(왼쪽)과 전성준 사무국장이 전봉준 장군 추모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추성수기자chss78@

“당시 함께 처형된 손화중·김덕명·최경선 장군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습니까. 전봉준 장군의 시신도 분명히 수습됐을 것이며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선친에 이어 2004년부터 전봉준 장군의 단소(가묘)를 관리하며 제사를 모시고 있는 전성준 씨(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전봉준 장군이 실제 묻힌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다.

“아버지는 단소 관리를 위해 집에서 8킬로 정도 떨어진 단이 있는 곳까지 새벽에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사 때 허름한 차림의 한 노인이 찾아온 적도 있었답니다. 거제도에 살고 있으며, 친손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후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장군의 시신과 친손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과 함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람이 중심인 세상을 만드는 게 장군의 뜻 아니었습니까. 우익이냐 좌익이냐 따지고, 정치적 심벌로 이용하려 하는 것은 그의 정신을 퇴색시키는 일입니다.”

그는 또 전봉준 장군의 유적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단소가 처음에는 조촐했는데 지금은 군더더기(비석, 석등)가 붙어 화려한 쪽으로 치장된 것 같다고 했다. 처음으로 돌려 사적지나 문화재로 등록되길 희망했다.

고창의 생가 역시 가난했던 장군의 집으로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낮아질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기리는 사람이나 단체에서 경구로 삼았으면 좋겠단다.

“독립지사나 애국지사처럼 서울 한복판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건립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적지나 기념관이 아닌, 서울의 중심부에 동상이 서는 날이 동학농민혁명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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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천안전씨전북종친회
글쓴이 : 소원/김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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